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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부정공>학생공휘형규가장(學生公諱亨奎家狀)
學生公諱亨奎家狀 先君諱亨奎字允直通政大夫副護軍諱得燁長子興德張公廷翼之外孫也以 純祖癸巳二月十八日生享年六十七而卒於 太上皇己亥四月二日越五月七日葬于順天府北住岩面大龜村後九龜峰下薪田嶝壬坐之原不肖鍾悳略擧世德事行泣血書于墓前之石曰我趙系出玉川以高麗侍中諱璋爲始祖名德相傳至諱元吉勳封玉川府院君有爲瑜麗末爲典農寺副正至我 太祖龍興之初入杜門洞罔僕守節爲東方著姓累傳至諱智崙有相好亭湛樂之風三傳至諱大春從遊於河西金先生之門皆中葉名祖也府君天姿溫厚敦模食貧失學無赫赫動人耳目之事業而服勤農畝竭力養親篤行孝友庭無間言接人以恭處事有裕樂善好義成立家計嘗赴漢城試觀光見屈及還遂令不肖從事儒文期待成就隨寓安分不求名聲故世亦群知其實也配豊川任氏大司諫錪後孫相休女事舊姑以孝對妯娌以和承順君子治家有法井臼之勞紡織之功靡不親執以潤生業閨門和順依然有古女士之風焉以戊戌九月二日生 高宗辛酉五月五日卒享年八十四祔葬先塋右谷猪洞艮坐原生四男一女男長不肖鍾悳次鍾浩鍾萬鍾玹女適木川張基顯不肖以季弟鍾玹之子東洙爲嗣女有三人長適南陽洪溫次適星山李相瑀次適瑞山柳秉源鍾浩有一子一女男益洙女適長興任基柱鍾萬有五男一女男奇洙道洙餘幼女適慶州鄭次甲鍾玹有二子二女長男東洙爲不肖後次致洙女適竹山安鍾燮餘不盡錄也嗚呼吾家自近世以來雖無達官大賢而以敦尙忠孝之風有望於京鄕久矣窃念府君至誠實行固守淸貧作力乎耕田供職質而無文故未能著世然源深者流長根固者發茂理之常也安知不食之報其有俟於將來之日歟不肖無狀從師受學未及成德而怱見宗國之傾覆入山修道戰兢自持懼忝所生而謹以文字敢述潜懿以圖顯刻若於異日限禁樵採者如柳下季壟而亦不犯耕犂之愚此可以少慰不肖罔極之痛而復泣而拱手以俟後之君子知斯言之不誣者也 不肖 鍾悳 謹撰 학생공휘형규가장(學生公諱亨奎家狀) 선군의 휘는 형규요、 자는 윤직(允直)이며 통정대부 부호군 휘 득엽(得燁) 장자요、 흥덕 장공 정익(廷翼)의 외손이시다。 순조(純祖) 계사년(癸巳年一八三三) 二월 十八일에 출생하여 고종(高宗) 기해년(己亥年一八九九) 四월 二일에 향년 六十七세로 별세하니 다음달 五월 七일에 순천부북 주암면 대구촌후 구귀봉하 신정등 임좌지원(大龜村後 九龜峰下薪田嶝壬坐之原)에 안장하였다。 불초 종덕(鍾悳)이 세덕과 사행을 들어 피눈물을 흘리며 묘소 앞 돌에 쓰고 말하기를、 우리 순창 조씨는 고려 시중 휘 장(璋)을 시조로 명덕(名德)이 서로 전하다가 휘 원길(元吉)에 이르러 훈공으로 옥천부원군에 봉해졌다。 생휘 유(甤)는 고려 말에 전농시 부정으로 이 태조가 조선을 개국함에 두문동에 들어가 부사이군의 절의를 지켜 동방에 이름난 성씨가 되었다。 여러번 전하여 휘 지륜(智崙)은 상호정(相好亭) 담락의 풍운(湛樂之風)이 있었으며 삼전하여 후 대춘(大春)은 김 하서(金河西)와 종유하였으니 다 우리 선대 중엽 명조이시다。 부군이 하늘에서 받은 품성이 온후하나 집이 가난하여 배우지 못하였음으로 혁혁하게 사람의 이목을 움직일 사업이 없고 농사를 부지런히 하여 어버이 봉양에 힘을 다하고 효도와 우애를 두텁게 행하니 가정에 사잇말이 없으며 사람을 공순하게 대접하고 일을 여유있게 처리하며 착한 것을 즐겨하고 의리를 좋아하여 가계를 성립하였다。 일찌기 한성에 과거 시험을 보러 갔으나 힘이 이에 미치지 못하여 돌아와서 마침내 불초로 하여금 선비의 문하에 종사케 하여 성취를 기대하였다。 형편에 따라 분수를 편안히 하고 성명을 탐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세상에서 그 실상을 아는 자가 적었다。 부인은 풍천임씨(豊川任氏)로 대사간(大司諫) 전(錪)의 후손(後孫)인 상휴(相休)의 따님으로 시부모를 효도로서 섬기고 동서를 화이로서 대하며 군자를 공순하게 받들고 집을 법도있게 다스리며 물 길고 방아찧는 수고며 길쌈하는 공역을 몸소 잡지 아니한 것이 없이 하여 생업이 윤택하니 집안이 화순하고 옛적 여사의 풍의가 역력하였다。 무술년(戊戌年) 九월 二일에 출생하여 고종 신유년(辛酉年) 五월 五일에 향년 八十四세로 별세하시니 선영우곡 저동 간좌원(先塋右谷猪洞艮坐原)에 부장하였다。 남은 종덕(鍾悳)·종호(鍾浩)·종만(鍾萬)·종현(鍾玹)이요 딸은 목천(木川) 장기현(張基顯)의 부인이다。 불초가 아들이 없어 계제 종현의 아들 동수(東洙)를 후사로 삼고 딸은 남양(南陽) 홍 온(洪溫) 성산(星山) 이상우(李相瑀) 서산(瑞山) 유병원(柳秉源)에게 출가시키고 남익수(益洙) 장흥(長興) 임기주(任基柱)의 처는 종호(鍾浩) 소생이요 남 기수(奇洙) 도수(道洙)등 나머지는 어리고 경주(慶州) 정차갑(鄭次甲)의 처는 종만 소생이요 남 동수(東洙) 치수(致洙) 죽산(竹山) 안종섭(安鍾燮)의 처는 종현의 출인데 동수는 종가의 후사로 출계하였다。 아、 우리 집안이 근래에 높은 벼슬과 큰 현인이 없으나 충효의 풍교를 두텁게 숭상함으로 경향간에 명망이 있는지가 오래다。 내가 생각하건데 부군의 지성 실행이 굳이 청빈을 지켜 힘을 다하여 밭을 갈고 맡은 바 직책이 질박하며 학문이 없는고로 능히 세상에 나타나지 못하였으나 그러나 근원이 깊은 자 흐름이 길고 뿌리가 굳은 자 가지가 무성한 것은 이치의 떳떳한 것이라 어찌 갈지 아니한 보시가 후일을 기다릴 줄을 알겠는가。 불초 무상이 스승을 쫓아 학문을 배워 덕을 이룬데 미치지 못하고 문득 나라가 망함을 보고 산에 들어가 도를 닦고 스스로 몸을 가지며 어버이를 욕되게 할까 두려워하여 삼가 문자로서 감히 잠긴 덕을 기술하여 나타나게 하니 만일 다른 날 나무하고 꼴을 벤 것을 금한 자 유하계룡(柳下季壟) 같이 하고 또 쟁기로 가는 우치를 범치 아니하면 이로서 가히 불초의 망극한 슬픔을 위로하고 다시 울며 손을 마주 잡고 뒤에 군자가 이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게 하노라。 불초(不肖) 종덕(鍾悳) 삼가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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